◆현대사,공부하지마 역사마을

현대사 공부하지마 다쳐!
출처 : 한겨레21


그들은 대한민국을 비하하기 위해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열정을 불태웠을까… <인식>과 <재인식>논란을 계기로 더듬어보는 70~80년대 ‘한국사 연구’의 추억
요즘은 대학입시 수석 합격자를 인터뷰하는 관행이 사라졌지만, 과거 우리는 판에 박힌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과외는 받지 않았고, 오직 학교 수업만 충실히 했다고…. 가물에 콩 나듯 그런 성실한 학생도 있었겠지만, 들리는 소문은 그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학교 수업만 성실히 받았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이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 “어떤 현실정치적 함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임하는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바로 그 책이다.
친일문제 다시 거론하기도 힘들어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박지향은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1970~80년대의 현대사 연구는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1987년 4월28일 검찰이 압수한 이념서적들. (사진/ 보도사진연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8월25일 독립유공자와 유족 초청 오찬에서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직접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실천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 번씩 한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누구 피가 거꾸로 돈 것인지, <재인식> 편집위원은 역사학자의 기본인 사실확인에서부터 오류를 범한 셈이다.
대단히 공격적인 머리말과 권말의 대담, 그리고 몇 편의 뉴라이트 경향의 논문이 문제이긴 하지만, <재인식>에 실린 다수의 논문은 가벼이 볼 수 없는 논문들이다. 역사가 짧은 현대사 연구의 깊이와 폭을 더한 글들로, 이 논문들의 문제제기는 학계에서 진지한 토론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집진의 과도한 ‘사명감’과 수구언론의 호들갑으로 인해 이 책이 뉴라이트나 수구 진영의 성전처럼 포장되면서 정작 이 책에 논문의 재수록을 허락한 몇몇 필자들은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임대식이 <역사비평> 2006년 봄호 머리글에서 적절하게 평한 것처럼 <재인식>은 뉴라이트와 탈근대론의 부적절한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재인식>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임대식의 글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처음 나온 1970년대 후반 이래의 현대사 연구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에서는 현대사와 근대사를 칼같이 구분하지만, 우리가 애써 구분해보아야 영어로는 둘 다 ‘modern history’가 된다. 현대사를 ‘contemporary history’라고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쓰는 의미의 현대사라기보다는 ‘당대사’ ‘동시대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보아야겠지만, 한국에서 유달리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은 분단과 전쟁과 학살의 현장인 한국에서 현대사 연구가 태생부터 지녀야 했던 정치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국사 찾기’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란 말을 쓰지만,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1970·80년대의 현대사 연구는 정말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 현대사 연구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80년 5월의 광주가 준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모두를 해방 직후로 이끌었다. (사진/ AFP연합)
1970년대의 한국은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 “묻지 마, 다쳐”가 선배가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었던 사회다. 이 난을 통해 여러 번 강조했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어찌나 확실하게 죽여놨던지, 친일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제주 4·3 사건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됐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대사의 비극적 진실은 그저 삶을 가위 누르는 악몽이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도 못하는 처지를 그린 <순이 삼촌>도 판금도서 목록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문학이 조금 자유로웠던지 <창작과 비평>에는 더러더러 해방 직후의 상황을 다룬 소설들이 실리곤 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4년에 나오고, 송건호의 <민족지성의 탐구>가 이듬해에 나오면서 이른바 ‘의식화’(아직 의식화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이었을 것이다) 교재가 풍성해졌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를 다룬 책은 별로 없었다. <창작과 비평> 등에 실린 논문을 복사·제본해 <현실인식의 기초>라는 학생운동 진영의 기초 세미나 교재를 처음 만든 것이 1979년이었다. 학생운동 진영이 처음으로 ‘커리’(커리큘럼)를 만들어 의식화 교육을 시작할 무렵, 대학가에서는 아직도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존 롤스 같은 보수 사상가의 <정의론>, 얼마 뒤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되는 이규호가 쓴 <사람됨의 철학> 등이 세미나 교재로 이용됐다.
광주의 충격이 현대사 연구를 이끌다
나는 1978년 계열별로 대학에 입학해 1979년 국사학과에 배정됐는데, 당시 국사학과에는 ‘현대사’라는 과목은 아예 교과목으로 개설되지 않았다. 현대사는커녕 독립운동사조차 강의가 개설되지 없었고, 아마 ‘한국최근세사’라는 제목하에 의병투쟁에 대해서는 배웠던 것 같다. 서울대가 특히 사정이 나쁜 것이었지만, 다른 대학도 형편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1979년은 마침 3·1운동 6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국사학과를 중심으로 학생들끼리 심포지엄을 하자고 해서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역사가 지워진 시대이다 보니 자료도 많지 않았다. 1977년에 지식산업사에서 그동안의 일제시대에 관한 논문을 모아 세 권으로 엮은 <한국근대사론> 정도가 그나마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 <한국민중사>는 88올림픽을 앞두고 시행된 운동권 사냥의 희생양이었다. 다행히 6월 항쟁이 터져 발행인이 석방됐다.(사진/ 한겨레)
<해전사>가 나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초판 발행일이 1979년 10월15일로 되어 있으니, 박정희가 죽기 10여 일 전에 나온 것이다. 정말 유신 말기에 나온 책이다. <해전사>는 1989년 제6권까지 나왔지만, 처음부터 시리즈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왜 분단이라는 비극이 우리 민족과 국토에 닥쳐왔는지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이 시대에 대한 해명을 통해 “그 이후의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과학은 비로소 맥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하에 “하나의 시도 내지 입문서”로서 나온 책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유신정권에 의해 죽고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되던 1975년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언론인들이 대거 해직당한 해이며,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해이기도 하다. 많은 언론인이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호구지책으로 출판사를 차렸고, 긴급조치로 쫓겨난 학생들은 선배들이 차린 출판사의 직원이 되었다. <해전사>도 이렇게 만들어진 출판사 중 하나인 한길사에서 나온 것이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허탈감과 기대 속에서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해전사>를 읽기 시작했다. 생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부분 여기저기 이전에 발표된 글을 모은 책이었지만, 10·26 직후의 상황은 8·15와 4·19에 뒤이은 또 하나의 전환기가 아니었던가? <해전사>로 새롭게 만난 8·15와 20주년을 맞게 되는 4·19. 그러나 ‘서울의 봄’은 속절없이 끝나고 말았다.
군사독재가 강화된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분명했지만, 현대사 연구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역시 1980년 5월의 광주가 준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모두를 해방 직후로 이끌었다. 불행하게도 <해전사>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1982년 말 돌베개에서 <한국현대사의 재조명>이 나오고, 이어 1983년 초 일월서각에서 <분단 전후의 현대사>가 나왔으며, 1984년에는 사계절에서 <한국 현대사, 1945∼1975>이 나왔다. <해전사>가 철저하게 국내 필진의 글을 모은 것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은 영어와 일어로 쓰인 주요 논문이나 연구서의 한 부분을 번역해 모은 것이고, <분단 전후의 현대사>도 국내 필자의 글이 2편 실려 있지만, 기본적으로 해외 연구자들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한국 현대사, 1945∼1975>는 미국의 진보적 한국 연구자들이 펴낸 의 번역본이었다. 이 세 책에는 모두 브루스 커밍스의 글이 실려 있는데, 1981년 미국에서 간행된 그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번역 출간되기 전부터 널리 읽혀졌다.
초기 현대사 책의 출간에서는 현재 열린우리당 소속인 유기홍 의원이 당시 학내 시위로 실형을 살고 나와 출판사에 다니며 큰 구실을 했다. 나도 그 무렵 군대에 끌려갔다 온 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1960년대>(거름출판사), <진보당>(지양사) 등을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편집했고, 돌베개에서 이정식·스칼라피노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3을 번역하면서 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 50대의 대학교수들이 친일파나 독재자들에겐 너그러우면서, 과거청산에 대해서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회 과거사법 발의 장면.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망망대해에서 목말라 하는 연구자
현대사 공부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보통 고대사는 해당 시대의 자료를 다 쌓아도 무릎을 넘지 않고, 고려사는 문집을 합쳐도 키를 넘지 않는데, 조선시대는 방 하나 가득이 되어 자료가 넘쳐나기 때문에 고려시대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조선시대를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자료가 방 하나 가득이면 현대사는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자료가 많아서 취사선택에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현대사 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우리는 마치 사방을 둘러봐도 물뿐인 망망대해에서 목말라하는 사람들처럼 자료 부족에 허덕였다. 주변에 책 빌려주었다가 문제가 되어 징역을 살고 고문당한 사연을 심심치 않게 듣는 마당이니, 자료를 가진 사람들도 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여간해선 자료를 보여주려 하지도 않았다. 도서관에 해방 직후에 간행된 자료가 있어도 대부분 특수자료로 분류해 보여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자료를 구해서 읽은 시간보다 헌책방 뒤지거나, 어디에 무슨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떻게 빼낼까 궁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1986년 김남식 선생님과 함께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 15권을 돌베개에서 묶어 낸 것도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료 부족 때문에 현대사 연구를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깨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자료 접근에 가해진 제약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동안 제목으로만 들었던 단행본, 좌익계 신문과 잡지의 주요 논문, 회의록, 팸플릿 등이 2만 쪽가량 쏟아져나와 해방 3년사에 관해서는 자료 부족 때문에 연구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되었다. 또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미군정 자료가 15권 분량으로 일월서각에서 영인본으로 간행됐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과 같은 자료를 모아서 내다 보니 당국의 단속이 우려됐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주요 대학 사학과의 학부는 물론이고 대학원에도 현대사 강의나 세미나는 설치되지 않았다. 제목에 ‘현대사’라 되어 있어도 적당히 일제시대나, 심지어 어떤 대학에서는 현대사에서 대원군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현대사를 공부하겠다고 하면 워낙 험한 시대이다 보니 선생님들께서는 다친다고 만류하셨다. 정규과정에 근현대사 강의가 부족하다 보니 사학과 대학원생들이 밖에서 세미나팀을 조직했다. 1984년 망원한국사연구실이 문을 열었고, 여기서도 이듬해에 현대사 팀을 만들어 공부를 시작했다. 1986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는데, 망원한국사연구실은 주로 한국사 전공의 석사과정 중심으로 모여 사명감은 충천했으나 논문을 집필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한 반면, 역사문제연구소는 사학 전공자들에 비해서는 한결 몸이 가벼운 사회과학연구자들까지 포함해 모였고, 이미 연구 역량을 갖춘 장년층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적극 가담해 더 빨리 성과를 내었다.
운동권 사냥, <한국민중사>를 잡아먹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군사독재 정권은 1988년 올림픽 이전에 운동권을 싹쓸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1986년 건국대 사건으로 1천여 명의 학생을 잡아들이더니 1987년 초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살해됐다. 비단 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 농민, 종교, 문화 등 전방위에 걸쳐 군사독재의 공세가 시작됐고, 이런 분위기에서 출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공안검사로 유명한 김원치에 의해 풀빛에서 간행된 <한국 민중사>가 표적이 되어 풀빛의 실질적인 발행인 나병식 등이 구속됐다. 민청학련 사건의 무기수인 나병식은 역사를 전공했고, 당시 후배들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국 민중사>는 유기홍이 중심이 되고 도진순(현재 창원대) 등 대학원생과 제헌의회 사건의 핵심인 최민 등 서울대 국사학과 77·78학번들이 처음에는 정철영어에서 영어로 한국사를 내려 한다며 한국어 저본의 집필을 부탁받아 작업하다가 중간에 정철영어 쪽에서 포기하는 바람에 풀빛에서 내게 된 것이다. 유기홍, 최민 등이 각각 수배되는 등 사고가 생겨 현대 편이 마무리되지 못했는데, 윤대원(현재 역사학연구소)이 마침 군에서 제대해 마무리하여 책이 나왔다. 민중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역사서는 당시 독자의 상당한 호응을 얻었지만, 공안당국은 더 뜨겁게 나왔다. 그동안 나온 현대사 관련 서적들이 모두 판매금지를 당해 금서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발행인이 구속되거나 필자들이 잡혀가지는 않았는데, <한국 민중사>의 경우 출판사 사주가 구속된 것이다. 다행히 6월항쟁이 겹치면서 나병식은 석방됐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그의 석방을 위해 뛰어다니던 풀빛 주간인 문학평론가 채광석이 이 무렵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해전사>도 1985년에 강만길 선생을 대표저자로 하여 2권이 나왔다. 김광식이나 홍인숙 등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해전사> 1권을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필자로 참여했지만, 여전히 40·50대 필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1987년 말에는 박현채 선생을 대표저자로 하여 3권이 나왔는데, 이번 <재인식>에도 논문이 수록된 이완범 등 젊은 필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1989년에는 4, 5, 6권 세 책이 무더기로 나왔다. 최장집 선생이 대표필자가 된 4권은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 운동이나 4·3항쟁 같은 민감한 문제를 처음 다루었고, 김남식 선생이 대표필자가 된 5권은 통일부 장관이 된 이종석 등 젊은 필자들이 북한의 혁명전통과 인민정권의 수립을 주로 다루었다. 6권은 박명림ㆍ이완범 등이 연구사를 정리했다. 1979년 1권이 처음 나온 <해전사>는 이렇게 1989년 6권까지 나오면서 신진 필자들을 대폭 발굴해 국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했다.
광주의 충격 속에서 현대사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신문 쪼가리, 잡지 쪼가리를 모아 논문 목록을 작성해가던 것이 벌써 25년 가까이 지나버렸다. 노동‘현장’에 가는 대신 책상이 당시 현대사 연구를 마음먹은 사람들의 ‘현장’이었고,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공부가 세상을 바꾸는 지식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선생님들은 이렇게 공부해라 가르쳐주는 대신, 현대사 공부하면 다친다고, 한국사에는 아직 연구되지 않은 주제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걱정하셨다. 공안당국은 <한국 민중사> 사건이나 <한국현대 민족해방 운동사 사건>에서와 같이 현대사 연구가 대중화되거나 운동과 결합할 경우 그냥두지 않았다.
그 공부가 나라를 비하하기 위해서인가
그 질풍노도의 시대에 ‘묻지 마 다쳐’를 뿌리치고 현대사 공부를 시작한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20대였다. <재인식> 편집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필연론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과 민중을 소중히 여겼음은 틀림없다. 일제시대를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은 당시에도 알았지만, 독립운동사 연구를 불온히 여기던 상황에서 연구영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 <재인식>의 편집진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우리가 대한민국을 비하하기 위해 어렵게 현대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을까? 1989년의 <해전사> 단계에서는 아직 다가서지 못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이 <재인식> 편집진이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또 무엇인지를 모른 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의 “암중모색에서 일어난 시행착오”에 불과한 것일까? 1980년대의 현대사 연구에 분명히 미숙하고 거친 부분은 있다. 그것을 현대사에 관한 한 선생님에게 배워본 적 없는 20대들의 소아병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50대 대학교수들이 친일파나 학살자, 독재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면서, 현재의 과거 청산에 대해서는 독립군이 친일파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강한 격문을 내세우며, 동료 연구자들에 대해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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